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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간부) 모시는 날
김광석(광주서부경찰서 경무과장, 재단 편집위원)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다. 공직사회도 정기 인사와 승진으로 분주한 시기다. 누군가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고, 누군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난다. 30여 년을 공무원으로 살아온 필자는 이 시기가 되면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는 진정 국민 앞에 당당한 공복(公僕)이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답하건대, 사실 우리 세대 공무원들에게 ‘상사 모시기’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20여 년 전, 필자가 경위로 승진하여 시골 경찰서 경무계장으로 부임했을 때 인수받은 것은 바로 관내 식당들의 특징과 상사들의 취향이 빼곡히 적힌 ‘맛집 리스트’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조직의 화합을 위한 ‘예우’이자 ‘전통’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그것은 부하 직원들의 열정과 지갑을 갈취해 만든 가짜 권위의 성벽이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의가 아니라, 공직의 근간을 흔드는 ‘적폐’라고 말이다.
정부가 정의하는 ‘상사(간부) 모시는 날’은 명확하다. 하급 직원들이 1) 순번을 정해 2) 사비로 3) 상사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관행이다.

최근 행정안전부와 인사혁신처가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는 국민이 믿기 힘들 정도로 참담하다.
2024년 11월 실시된 1차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5만 4,317명 중 18.1%가 최근 1년 내 상사 모시는 날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특히 지자체는 23.9%로 중앙부처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빈도다. 지자체 공무원의 45.9%가 주 1~2회나 상사의 식사 수발을 들고 있었다. 상사의 직급은 과장급 부서장이 57.0%로 가장 많았으며, 지속 원인으로는 ‘기존부터 내려온 관행(37.8%)’이 1위로 꼽혔다.
국민 여러분께 묻고 싶다. 점심시간마다 상사의 입맛에 맞춰 식당을 예약하고, 본인의 얇은 월급봉투를 털어 상사의 밥값을 결제하는 공무원이 과연 국민을 위한 행정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응답자의 91%가 이 관행이 ‘필요 없다’고 절규하고 있음에도, 37.4%는 ‘간부 공무원의 인식 개선’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단순한 식사 한 끼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사회 내부에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선 시대 ‘면신례(免新禮)’가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신입 관료가 선배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던 이 구습은 오늘날보다 훨씬 가혹했다. 선배들의 요구를 맞추려다 가산을 탕진하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심지어 모욕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거나 구타로 사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역사 속의 성군들은 이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성종은 면신례를 ‘살인죄’와 다름없다고 규정하며 주동자에게 장형 100대를 치고 영구히 관직에서 쫓아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투입해 기습 단속을 벌였으며, 이를 어긴 군수를 즉각 파직하고 유배를 보냈다. 조선의 감사 기관인 사헌부는 이를 ‘분경(奔競, 권력자에게 줄대기)’으로 간주해 청탁금지법 위반 수준으로 엄히 다스렸다.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의 고혈을 짜내 상사에게 아첨하는 자는 목민관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율곡 이이가 신입 시절 선배들의 술상 요구를 “공적 관청에서 사적 잔치를 베푸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며 단칼에 거절한 일화는 오늘날 우리 간부들이 뼈아프게 새겨야 할 대목이다.

2026년 현재, 정부는 ‘상사 모시는 날’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단순히 캠페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발 시 청탁금지법과 공무원 행동강령 위반으로 엄중히 문책한다.
• 자발적 대접일 경우: 상사의 요구가 없었더라도 청탁금지법상 금품수수에 해당하여 감봉에서 강등까지 징계가 가능하다.
• 상사의 요구가 있을 경우: 이는 명백한 ‘갑질’이자 향응 수수다. 정직에서 최대 파면까지 처해질 수 있다.
• 금액 기준: 1회 100만 원 또는 매 회계연도 300만 원 초과 시에는 징계와 별도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정부는 2026년 3월 조사부터 경험률이 높은 기관의 명단을 대외적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조금씩 줄이겠다”는 안일한 태도가 아니라, 단번에 끊어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정부의 서슬 퍼런 칼날에도 불구하고 왜 이 구습은 좀비처럼 살아남는가? 필자는 세 가지 근본 원인을 지목한다.
첫째, 제왕적 인사권의 남용이다. 승진과 보직 경로가 상사의 주관적인 평판에 크게 좌우되는 구조에서는 하급자가 상사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시기'는 그들에게 존경의 표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보험료'다.
둘째, 책임은 없고 권위만 앞세우는 조직 문화다. 상사는 대접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부하는 상사를 만족시키는 것을 업무의 연장선으로 착각한다. 이러한 ‘침묵의 공모’가 지속되는 한, 어떤 제도도 무용지물이다.
셋째, 가짜 미덕의 함정이다. “그래도 식구인데 밥 한 끼 정도는...”이라는 온정주의가 공적 영역의 투명성을 흐린다. 근무 시간에 하급자의 돈으로 먹는 점심은 결코 ‘정’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혁신은 무엇을 할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만둘까를 결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직사회가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은 바로 하급자의 희생 위에 군림하는 가짜 의전이다.
해결책은 명확하다.
• 인사 시스템의 투명화: 상사의 주관적 평가 비중을 대폭 낮추고, 동료와 하급자가 평가하는 다면평가 결과를 인사에 실질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 상사들의 솔선수범: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기관장이 먼저 도시락을 싸 오거나 구내식당을 이용하거나 직접 식당을 예약하고 결제하는 모습을 보일 때 조직은 변한다.
• 익명 신고 및 보호 강화: 내부 고발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하고, 위반 사례 발견 시 해당 기관 전체에 불이익을 주는 ‘공동 책임제’를 도입해야 한다.

공무원은 국민에 대한 봉사자다. 헌법 제7조가 규정하는 이 준엄한 가치는 결코 상사 개인을 향한 봉사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소중한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상사의 식단 메뉴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
이번 정부의 근절 대책이 또다시 ‘태풍 뒤의 고요’처럼 흐지부지되어서는 안 된다. 나무의 잔가지가 아니라 뿌리를 뽑아야 한다.
상사 모시기를 멈출 때, 비로소 공직사회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할 것이다.
꽃이 피는 이 계절, 새로 부임한 젊은 공무원들이 상사의 단골집 위치를 외우는 대신 시민들의 불편을 해결할 아이디어를 고민하며 활짝 웃는 모습을 기대한다. 공직의 품격은 화려한 의전이 아니라, 국민 앞에 당당한 청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선진 공직문화의 시작이다.